3편: 조씨와 하후씨, 종친들의 거센 견제와 고립된 사마의

 사마의가 조조의 의심을 피하고 조비라는 든든한 아군을 얻어 조정의 중심에 섰을 때, 그의 앞길이 탄탄대로였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조비가 황제가 되면서 사마의의 지위는 올라갔지만, 이와 동시에 위나라의 권력을 뼈대부터 쥐고 흔들던 거대 기득권 세력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바로 위나라의 창업 공신이자 황실 종친 가문인 '조씨(曺氏)'와 '하후씨(夏侯氏)' 세력이었습니다.

타성(他姓) 출신인 사마의에게 종친 가문들의 견제는 조조의 의심만큼이나 숨 막히는 압박이었습니다. 언제 칼날이 들어올지 모르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사마의가 어떻게 그들의 감시를 뚫고 살아남았는지, 그 처절한 내부 정치 전쟁의 이면을 살펴보겠습니다.

1. 굴러온 돌을 향한 박힌 돌의 분노, 조진과 하후상

조조가 위나라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조인, 조홍, 조진 같은 조씨 일가와 하후돈, 하후연, 하후상 같은 하후씨 가문의 막강한 군사력 덕분이었습니다. 이들은 나라를 세운 주역이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고, 위나라의 핵심 군권과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입장에서 사마의는 조비의 줄을 잘 타서 갑자기 급부상한 '정치적 불청객'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조씨 가문의 차세대 리더였던 조진(曺眞)과 하후씨 가문의 핵심인 하후상(夏侯尙) 등은 사마의를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사마의가 똑똑하면 똑똑할수록 종친들의 위기감은 커졌습니다. 사마의가 군권에 손을 대거나 조정의 중책을 맡으려 할 때마다 이들은 "조씨의 나라는 조씨가 지켜야 한다"며 집요하게 사마의를 배척했습니다.

사마의는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가문의 배경도, 군사적 기반도 없던 그가 종친들의 거센 견제 속에서 정면충돌을 선택했다면 사마씨 가문은 진작에 멸문지화를 당했을 것입니다.

2. 사마의의 생존 카드: 공은 종친에게, 책임은 나에게

이 시기 사마의가 보여준 처세술은 '철저한 양보'와 '2인자 자처하기'였습니다. 그는 종친 세력과 절대 밥그릇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비가 경제 정책이나 군사 보급, 행정 제도를 정비할 때 실질적인 판을 짜고 밤새워 일한 사람은 사마의였습니다. 하지만 그 성과가 세상에 드러나고 공을 치하하는 자리가 되면, 사마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공을 조진이나 하후상 같은 종친들에게 돌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황제 폐하의 덕이자, 최전선에서 고생하신 종친 장군들의 공로입니다. 저는 뒤에서 서류나 정리했을 뿐입니다."

처음에는 사마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종친들도, 자신들의 명예를 높여주고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마의를 보며 조금씩 경계심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사마의는 권력의 화려한 조명을 종친들에게 양보하는 대신, 조정 실무라는 '실속'을 챙기며 자신의 가문을 지켜낸 것입니다.

3. 하후상의 죽음과 조비의 붕어, 더욱 팽팽해진 외줄 타기

시간이 흘러 사마의를 압박하던 종친 세력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후상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사마의의 가장 큰 방패막이였던 황제 조비마저 재위 7년 만에 급사하게 됩니다. 조비는 죽기 전, 어린 아들 조예(명제)를 보좌할 탁고대신으로 조진, 조휴 등 종친들과 함께 사마의를 임명했습니다.

조비의 죽음은 사마의에게 기회이자 가장 큰 위기였습니다. 자신을 지켜주던 군주가 사라지자, 조진을 비롯한 조씨 가문의 견제는 한층 더 노골적이고 거칠어졌습니다. 그들은 사마의가 황제 옆에서 권력을 쥐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전방의 한적한 지방관으로 내쫓거나 한직으로 밀어내려 했습니다.

사마의는 이때도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명을 따르며 지방으로 내려가 힘을 기르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종친들이 자신을 쫓아내며 방심하는 그 순간이, 훗날 자신이 군권을 쥐게 될 거대한 반전의 서막임을 사마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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